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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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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의 생애

장보고의 어린 시절

장보고는 오늘날의 전남 완도 출생으로 790년경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터 무예가 뛰어났고 특히 활을 잘 다루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각각 궁복(弓福)과 궁파(弓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활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당나라에서의 활약

신라사회의 혼란과 골품제도의 모순을 경험한 장보고는 20대 초반에 당으로 간다. 이곳에서 장보고는 무령군에 입대하여 30세(819년) 즈음에는 병사 약 천여 명을 거느리는 군중소장의 직위까지 올랐다. 무령군에서 퇴임한 장보고는 본격적인 무역활동을 전개한다. 824년 산둥반도 적산포에 적산법화 원을 건립하여 불교를 지원함은 물론 재당신라인의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해적소탕과 동북아 해상권 장악

9세기 초 해적들이 신라의 양민을 잡아다 중국에 노예로 파는 참상을 목격한 장보고는 이에 분노하여 신라로 귀국한다. 장보고가 흥덕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청해(완도)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막을 것을 건의하자 왕은 군사 1만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지 1년만에 해적이 소통되었다.

국제해상무역센터 청해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실시하였다. 청해진은 군사와 무역체제를 갖춘 군·산·상 복합체(軍·産·商 複合體)로서 일본 하카다와 중국의 적산, 영파 등지에 지사를 갖춘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였으며, 동남아와 아라비아상인이 오가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였다.

동서 문화교류의 전령사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이슬람 상인들의 주이용 항로인 동남아, 인도항로와 동아시아 항로를 연결시킴으로써 아랍으로부터 신라와 일본으로까지 연결되는 해상실크로드를 완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하였다.

장보고 암살과 해상왕국의 몰락

세계 무역의 한 축을 담담하며 동북아시아에 단일 경제권을 구축했던 장보고는 841년 신라정부가 보낸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며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청해진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동아시아 해상의 패권은 송나라 상인들과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넘어가고 만다.

장보고와 역사의 전환

장보고 이후 후삼국으로 분열된 신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장보고의 후예인 왕건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일본은 장보고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신흥 지방세력 등에 의해 장원제와 무사제가 형성되는 등 동북아시아는 고대사회에서 중세봉건사회로 전환되는 변환기를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