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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따옴표 3년 2개월 만에 돌아오다. 홍어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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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호(공주대 교수)

문순득

1801년 8월, 제주도에 외국인 5명이 표류해 왔다. 본래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는 외국인이 표류해오면 식량과 의복을 주고, 배를 수리해 주거나 본국으로 가는 배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막가외(莫可外)’라는 말을 거듭하며 바다만 가리켰다. 당황한 제주 목사는 비변사의 명을 받아 그들을 성경(盛京, 청의 심양)에 보내 대신 귀국시켜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경에서도 알 수 없다며 되돌려 보냈다. 성경에 다녀오는 동안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는 제주목사에게 명하여 남은 4명에게 양식을 주고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익히며 살게 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네 명 중 또 한 명이 죽었다. 남은 세 사람은 낯 선 이국 땅에서 하루 하루를 어렵게 버텨나갔다.

그러던 중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809년 우이도에 사는 홍어장수 문순득이란 사람이 나타나 그들이 여송국(Luzon: 루손 섬) 사람임을 알려준 것이다. 문순득과 몇 마디 말을 나눈 표류민들은 미친 사람처럼 울기도 하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제주목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명하였다. 여송국 표류민들은 그렇게 9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문순득은 어떻게 여송국의 언어를 알 수 있었을까?

문순득이 살았던 우이도는 도초도와 하의도 서편에 있는 비교적 큰 섬이다. 조선시대 흑산진 별장이 우이도에 머물렀으므로 소흑산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 죄인들은 우이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역시 처음에는 우이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807년 경에야 대흑산도로 옮겨갔다.

문순득의 직업은 홍어장수였다.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배를 타고 나가서 홍어를 사다가 나주에서 팔고, 나주에서 쌀과 생필품을 사다가 흑산도에 팔아서 이문을 남겼다. 1801년 12월, 스물 다섯 청년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주민 6명과 함께 홍어가 많이 잡히는 태사도라는 섬으로 홍어를 사러 갔다. 일행은 한 달 가까이 태사도에 머물며, 홍어를 잡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곧 하늘이 어두워지고 큰 바람이 불어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바람에 떠밀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일행은 기적적으로 살아서 유구국에 닿았다. 유구는 현재의 오키나와로 당시 청과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구국 사람들은 문순득 일행을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유구에 머무는 동안 문순득은 유구어도 익혔다. 하루하루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는 표류한 지 8개월 만에 청으로 가는 조공선을 타고 유구국을 떠났다. 당시 유구국은 조선인들이 표류해서 자국에 이르면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당초 유구에서 청을 향해 떠난 배는 세 척이었다. 그 중 ‘류구국 중산왕 조공선’이란 깃발을 단 두 척에는 조공 사절이 타고 있었고, 나머지 한 척에는 문순득 일행과 중국 푸젠성에서 표류해 온 중국인 32명, 그리고 유구인 60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세 척의 배가 유구의 수도 나하를 출발했을 때는 날씨가 쾌청했다. 문순득은 파도가 잔잔한 바다를 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설렘도 느꼈다. 그러나 큰 바다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또다시 비바람을 만났다. 바람을 피해 외딴 섬에 머물렀지만 곧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에 밀려 서쪽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세 척의 배는 각각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문순득이 탄 배는 바다 위를 14일 동안이나 떠다니다가 간신히 여송국(루손 섬)에 도착했다.

당시 여송국은 조선이나 유구와는 왕래가 없는 섬이었다. 따라서 여송국에서는 유구에서 만큼의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여송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배에 탔던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6명이 현지인들에게 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배를 댈 수 있는 섬은 곳곳에 있었지만 또다시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감히 내릴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푸젠성 사람들이 모여사는 화교 마을에 도착했다. 그제야 배에서 내린 문순득 일행은 9개월을 그곳에 머물며 마을 곳곳을 구경했다. 그 때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신묘(神廟, 파블로대성당)를 방문하기도 했다.

여송에 머물던 문순득은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여송국의 언어와 풍속을 빠르게 익혔다. 그리고 소주(蘇州)상인들의 쌀 거래를 돕는 등 일을 해서 여비를 마련하여 마침내 1803년 8월, 상선을 얻어 타고 간신히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리고 육로를 통해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 한양에 도착한 후 1805년 1월에야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왔다. 홍어를 사러 태사도로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문순득

문순득은 글을 배우지 못한 장사치였으나 총명하고 입담이 좋았다. 그의 표류 이야기는 곧 주변 사람들을 통해 퍼져 나갔다. 세상이 중국, 조선, 일본, 유구 정도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문순득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던 것 같다. 우이도에 귀양와 있던 정약전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이라는 글을 남겼다. “표해시말”에는 정약전이 그로부터 들은 유구, 안남, 여송,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언어와 풍속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훗날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사연을 듣게 된 정약용은 동전의 크기를 바꿔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그로부터 외국 선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운곡선설”이라는 글을 짓기도 했다.

홍어장수 문순득은 19세기 초에 필리핀과 마카오를 최초로 여행한 조선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필리핀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표해시말(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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