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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따옴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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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호(공주대 교수)

안용복

1696년(숙종22년) 10월 13일, 조정 대신들은 조정의 허락없이 일본에 다녀온 안용복의 처벌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원로 대신 남구만과 윤지완은 ‘그로 인해 울릉도를 침탈하려는 대마도주의 음모가 드러났으니 무조건 처벌할 수는 없다’고 했고, 좌의정 윤지선은 ‘후세에 그와 같이 법령을 어기고 일본으로 가는 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랜 논의 끝에 숙종은 원로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사형 대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안용복의 도일(渡日)은 임진왜란 이후 평온했던 조일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안용복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자료들이 있다. 먼저 이익의 “성호사설”과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그는 동래부의 전선(戰船)에 예속된 노꾼[格軍]으로, 왜관에 출입하며 일본어를 배워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그는 동래부에 속한 수군으로 일본어에 능통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죽도고”라는 일본 서적에 남아있는 안용복의 호패 자료에 따르면 그는 1658년생이며, 서울에 사는 오충추라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적혀 있었다(主京居吳忠秋). 주인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평민이 아니라 사노비였음을 의미한다. 주소는 ‘부산 좌천 일리(釜山 左川1, 현재의 부산시 동구 성남이로 54번길 부근)’로 적혀 있는데, 이곳은 왜관·경상좌수영과 가까운 곳이다. 또한, 그의 얼굴은 검붉었으며, 키는 약 4척 1촌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사노비로서 동래부의 전선에 예속된 수군으로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노비이면서도 수군에 속했던 것은 당시 사노비들이 군역의 의무를 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용복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다녀왔다. 첫 번째 일본행은 그의 나이 서른 여섯 살인 1693년에 있었다. 그 해에 안용복은 울산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 갔다가 울릉도 일대에 해물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박어둔이라는 사람과 함께 울릉도로 들어갔다. 그가 울릉도에 도착하니 많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정박하며 고기를 잡고 있었다. 안용복은 일본인들을 향해 조선 땅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들이 건너와 고기잡이하는 행위를 꾸짖었다. 그러자 일본 어부들은 ‘그들의 본거지가 본래 죽도이며, 울릉도에서는 철수할 것’이라고 해명하며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안용복은 죽도는 본래 우산도(독도)이며, 우산도 역시 조선의 영토임을 역설하였다. 일본인들의 행위에 분개한 그는 이튿날 우산도로 들어가 그들과 언쟁을 벌이다가 일본의 오키도까지 가게 되었다. 몸은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안용복의 태도는 당당했다. 안용복의 항의에 말문이 막힌 오키도주는 그를 백기주 태수에게 보냈고 백기주 태수는 다시 에도에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막부는 마침내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문서를 써 주게 하였다. 이는 일개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안용복이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서계를 가지고 귀국하는 도중에 대마도주에게 그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마도주는 빼앗은 문서를 위조하여 조선 어민이 일본 영토인 죽도에서 고기잡이를 못하게 해달라고 고쳐 조선 조정에 보냈다. 안용복은 이와 같은 정황을 동래부사에게 호소하였으나 부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월경한 죄만을 물어 2년 형을 내렸다.

형을 마치고 나온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년) 울릉도에 어부들과 함께 갔다가 고기잡이 하는 일본 어선을 또다시 발견했다. 안용복은 개인적인 자격으로는 왜구를 근절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고기잡이 하는 어선들을 송도까지 추격하여 문책하고, 관복을 갖춰 입은 후 스스로를 ‘울릉도 우산도 양도감세관’이라고 지칭하며, 백기 주 태수에게 강하게 항의 하고 사과를 받아 왔다. 안용복은 양양(襄陽)으로 귀국하여 관에 보고하고 또 오키 주에 있을 때 태수에게 보낸 서장을 바치어서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였다. 함께 따라갔던 여러 사람들의 진술도 일치하자 대마도에서는 더 이상 속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사람을 울릉도로 보내지 아니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용복이 대마도를 거쳐 귀국하지 않은 점을 트집잡아 죄를 물으려 하였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통교는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대마도주는 여러 차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문서를 보내는 동시에 안용복의 죄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수용하지 않았다. 안용복의 두 차례 일본행 이후 고종 초까지 울릉도 와 독도를 둘러싼 두 나라 간의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이처럼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드나들고, 울릉도가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했던 배경에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까지 일관적으로 추진된 공도정책에 원인이 있었다. 여말 이후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지자 조정은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도서민들을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정책 또는 공도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공도정책이 도서 지역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정부가 관리들을 파견하여 도서상황을 파악하고, 주민들의 상황을 살핀 것은 그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순신

17세기 말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안용복의 공로였다. 이후에도 대한제국은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칙령 41호를 통해 울릉도와 더불어 독도를 행정구역에 포함시켜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밝혔다. 이는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보다 5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러나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북에서 내려오는 러시아 군대를 견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울릉도를 빼앗았다. 울릉도, 독도 두 섬은 일제의 조선 국권 강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빼앗긴 가슴 아픈 영토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안용복의 울릉도·독도 수호활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안용복과 같은 인물이 없었더라면 호시탐탐 울릉도와 독도를 노렸던 일본인들에게서 소중한 우리의 영토를 지켜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용복 동상(독도 박물관 홈페이지)
< 안용복 동상(독도 박물관 홈페이지) >
안용복 기념관 전경(독도 박물관 홈페이지)
< 안용복 기념관 전경(독도 박물관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