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위기의 조선을 구한 영웅
   이순신 닫는 따옴표

문경호(공주대 교수)

이순신

1592년 4월 13일(음), 일본군을 태운 군함 수 백 척이 부산진에 들이닥쳤다. 당시 부산진을 지키던 장수는 정발이었다. 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맞섰으나 불가항력이었다. 부산진이 함락된 직후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도 함락되었다. 이로부터 불과 11일 만인 4월 24일에는 상주가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4월 28일에는 신립이 충주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오자 조정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마침내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 길에 나섰다.

본래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면 보급을 담당하는 수군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북상하여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개의 육군 주력부대가 쏜살같이 북진하였다. 젊은 일본의 세 장수는 서로 큰 공을 세우기 위해 앞다퉈 북진하여 한양을 점령하고 선조를 사로잡으려 하였다. 이른바 수륙병진,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을 수포로 돌린 것이 이순신이었다. 부산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수군과 보급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라는 뜻밖의 장벽에 부딪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터에서의 보급로 단절은 사실상 전쟁의 수행 불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마침 명에서 파견한 구원군과 조선군의 연합작전에 힘입어 평양이 탈환되면서 전쟁은 반전을 맞았다. 일본의 침입으로 망해가는 조선을 구한 인물, 그가 바로 이순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본관이 덕수이며, 1545년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에서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조 이변이 영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증조부 이거가 병조참의를 역임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와 뜻을 함께 했다가 기묘사화 때 목숨을 잃은 후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의 유년기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활쏘기와 말 타기, 글씨 쓰기를 잘했다고 한다. 또한, 때때로 다른 아이들과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으로 전쟁놀이를 하였는데, 만약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감히 이순신이 만든 군문의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576년(선조9)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한 후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곧은 성격 때문에 상관과 마찰을 빚기도 하고, 병력 부족을 이유로 여진족과의 싸움을 피했다가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관직에 복귀한 후에도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현재의 여수에 있는 전라좌수영에 부임했다. 부임 직후부터 그는 왜침에 대비하여 전투선을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군량과 군비를 확충하는 등 전쟁에 꼼꼼히 대비하였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판옥선과 거북선도 대부분 이 무렵에 제작 또는 정비된 것이다.

마침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좌수영을 지키던 박홍과 경상도 우수영을 지키던 원균은 군대와 군함을 버리고 도망 갔다. 일본 수군은 전쟁도 않고 남해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 인해 전라 좌수영은 졸지에 전쟁의 최전선이 되어 버렸다. 전쟁이 코 앞에 닥친 것을 직감한 이순신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외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면밀한 계획과 치밀한 작전을 토대로 옥포 해전, 한산 해전, 안골포 해전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 제영이 처음 설치된 것도 이 때였다.

일본의 주력 함선들이 이순신의 수군에 막혀 오가지 못하게 되고, 육지에서도 조명연합군과 의병의 항쟁이 이어져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일본은 명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강화회담이 실패로 끝나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던 일본군이 1597년에 재침입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한동안 잠잠했던 조선의 육지와 바다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싸워야할 이순신은 일본군의 간첩 작전과 선조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을 회복한 것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고 난 후였다.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에 바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순신이라는 사실을 선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순신

그가 다시 임지로 나가보니 남은 전선은 12척, 수군의 수도 12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절망도 잠시, 이순신은 다시 전선을 고치고 군대를 정비하여 명량에서 왜선 113척 중 31척을 물리치는 큰 승리를 이끌어냈다.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기적과 같은 승리였다. 명량 해전을 계기로 일본 수군의 기세는 형편없이 꺾였다. 그 후로 지지부진하던 정유재란은 풍신수길의 죽음과 함께 종점으로 치달았다. 이순신은 퇴각을 준비하는 일본군 수군을 섬멸하기 위해 노량에서 총력을 다하다가 유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가 임종 직전에 남긴 말은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그의 죽음이 병사들에게 전해지자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부하들은 그를 잊지 못했다. 1603년 그들은 자신들의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여는 따옴표 좌수영 수군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고 타루(墮淚, 눈물을 흘림)라 이름 한다.
(이는)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여 그의 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는 데에서 취한 것이다. 닫는 따옴표

임진왜란 시기의 급박했던 상황과 이순신의 피나는 노력, 그리고 조선 수군의 통쾌한 승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그가 전쟁 기간 동안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생애는 국가와 통치자들의 역할, 그리고 국토 방어에 있어 해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해양 방어의 중요성을 잊었던 조선은 결국 3백년 후에 다시 일본의 침입을 받아 그들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5천년의 한국사에서 크고 작은 외적의 침입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잘 견디고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게 된 것은 이순신과 같이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위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 타루비(문화재청), 국보 제76호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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