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해양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다
   태조 왕건 닫는 따옴표

윤용혁(공주대 명예교수)

태조 왕건(877-943)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궁예로부터 ‘해군장군(海軍將軍)’으로 임명되어 바다를 누볐던 해군 출신이며, 해양의 힘을 동력으로 삼아 그 위업을 달성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2006년에 진수한 4200톤급 구축함 ‘왕건함’은 해군으로서의 태조 왕건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918년에 건국하여 936년 한반도 재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고려 왕조는 실질적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 지역 통합과 문화다양성을 이룩한 나라, 복잡한 대외 관계의 여건 속에서 민족의 자주성과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태조 왕건은 한반도의 중부 개성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호족 출신이다. 선대의 기록은 전설적이고 모호한 점이 많으나 적어도 신라 말 예성강, 임진강, 한강을 모여 있는 경기 연안 지역을 무대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한 집안 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라 말 혼란기에 궁예의 정권이 들어서자 자연 그 휘하에 종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왕건을 정치적 인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왕건의 성공 비결 첫째는 그가 자신의 장기(長技)를 적극 활용 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그가 익숙했던 바다를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궁예 휘하에서 왕건이 거둔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은 나주 일대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에 교두보를 확보한 사건이다. 이 지역은 이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으로 후백제를 위협하는 급소가 되었다. 나주는 지리적으로 후백제의 배후일 뿐 아니라 바다를 통하여 국내외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관문이기도 했는데, 이곳이 왕건에 의하여 장악됨으로써 견훤은 육전에서의 일방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끝내 전체 국면을 주도하는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태조 왕건
해상왕 장보고

나주 일대를 겨냥한 왕건의 첫 시도는 903년에 이루어졌다. 그해 3월 그는 해군 병력을 이끌고 전남 서해안에 상륙한 다음 나주와 주변 10여 개 군현을 접수하는데 성공하였다.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나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파악하고 이 문제를 뱃길과 해군, 바다를 이용하여 기선을 잡은 것이다. 뒤이어 909년 왕건의 군은 염해현(전남 무안 군)에 상륙하여 오월에 파견되는 견훤의 사신선을 나포하고, 서남해 지역의 중심 도서인 진도를 장악한다. 나주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현실화한 것이다. 이에 의하여 견훤과의 한판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912년에 왕건은 나주 일대를 둘러싼 견훤과의 정면 대결의 전투, ‘진검승부’를 치르게 된다.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서남해 지역 공략을 개시하자 견훤은 군선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일대에 집결시켜 왕건 군의 나주 접근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에 왕건은 화공 (火攻)으로 견훤군을 기습하였다. 밀집한 군선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허를 찌른 것이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후백제 군선을 집어삼켰다. 후백제군은 ‘죽은 자가 태반’이었고 견훤은 쪽배를 이용하여 탈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덕진포 해전인데, 강봉룡 교수는 이 전투를 제갈공명의 ‘적벽대전’에 비견하여 ‘목포대전(木浦大戰)’ 으로 칭한 바 있다. 이 전투에 의하여 왕건의 나주 장악은 확고해지고 이후 고려에 의한 통일에 이르기까지 견훤은 결코 이 지역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백제와의 전투를 위하여 왕건은 1백 여 척의 군선을 건조하였다. 그 가운데 10여 척의 대선은 사방이 각 16보(), 갑판 위에는 다락을 세웠는데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었다고 한다. ‘16보()’를 이도학 교수는 ‘31m’로 추산하였는데, 결국 왕건의 승리도 대규모 군선을 제작할 수 있는 해양의 기술력에 의하여 뒷받침 되었던 것이다.

왕건이 나주를 지속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역 토착 호족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나주의 오다련 (吳多憐)이다. 그의 딸이 장화왕후 오씨이며, 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이 바로 제2대 혜종이다. 왕건은 918년 중망에 의한 쿠데타를 통하여 고려왕조를 개창하였고, 936년 후백제를 제압하여 통일의 대업을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 이외에도 서해와 남해 각 지역 해상세력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들였다. 요컨대 왕건의 건국과 통일의 과정에 있어서 나주의 장악은 시종 가장 큰 동력이 되었으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왕건의 해상 능력이었다. 이후의 고려왕조가 안정된 국가로 성장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도 해양국가로서의 그 힘이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그만큼 바다의 중요성이 큰 나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해양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이것은 조선시대 5백 여년 간의 해금 정책, 그리고 분단과 대결의 현대사가 이어지면서 깊이 자리잡은 해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한반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우리 역사의 통합을 성취한 고려왕조의 건국과 통일이 해양을 동력으로 한 것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침 내년 2018년은 왕건에 의하여 고려왕조가 건국된 지 꼭 1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하여 2018년을 ‘고려의 해’로 정하고, 통일과 통합, 문화 융성, 국제화 등 우리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함께 성찰하는 기회를 만들려는 준비가 지금 진행 중에 있다.

여는 따옴표 1100년, 코리아 again!
거기에 바로 바다, ‘해양’이 있었다는 사실도 결코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닫는 따옴표

주 완사천 우물가에 조성한 태조 왕건상 나주 완사천 우물가에 조성한 태조 왕건상
(장화왕후 오씨와의 첫 만남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