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동아시아 해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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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룡(목포대 사학과 교수, 도서문화연구원장)

장보고는 『신당서』, 『삼국사기』, 『속일본후기』와 같은 당, 신라, 일본 등 3국의 정사(正史)에서 공통적으로 대서특필한 인물이었다. 동시대에 살았던 당의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과 일본의 고명한 스님 엔닌(圓仁) 등이 극찬했던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이러한 호평은 그의 혁혁한 해양활동의 성과에서 나온 것이니, 그를 일러 ‘동아시아 해상왕’이라 해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던가! 장보고가 태어나 활동했던 8세기말~9세기 전반은 동아시아 3국 공히 왕권이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바다에는 해적이 난무했다. 서남해의 어느 섬에서 태어난 장보고는 군인으로 출세하기로 마음먹고 잦은 반란으로 혼란에 빠져 있던 당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군공을 세워 서주 무령군의 군중소장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당의 동해안에 흩어져서 경제활동을 영위하고 있던 재당신라인들의 저력을 발견하고서 어렵게 얻은 군직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당()의 당국과 연결하고 해적들과 싸우면서 재당 신라인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산동반도의 동단에 위치한 적산포를 중심 포구로 삼았고, 적산포의 배후에 있는 적산에 대규모 사찰(‘적산법화원’)을 건립하여 재당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대내외의 무역업에 주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828년에 돌연 귀국을 단행하였다. 재정 난에 시달리고 있던 신라의 흥덕왕과 담판하여 신라 조정에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의 대사로 임명했고,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청해진에 1만 여명의 군사 주둔을 허용하였다. 장보고는 이를 기반으로 하여 신라의 서남해 일대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당에 매물사(買物使)가 거느리는 무역선단을, 일본에 회역사(廻易使)가 거느리는 무역선단을 각각 파견하여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해상무역을 주름잡았다.

해상왕 장보고
해상왕 장보고

더 나아가 그는 청자 생산에까지 사업을 확장하였다. 당시에 청자는 최고의 무역상품으로서 오직 중국만이 생산기술을 독점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당으로부터 그 기술을 이전받아 강진과 해남 일대에 대규모 청자 생산단지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신라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장보고의 무역상품은 신라와 일본의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최상의 신분층에서 하위 신분층에 이르기까지 간절하게 소장하고 싶어 했으므로 흔히 ‘염물(念物)’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 ‘염물’을 구매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고, 사치풍조가 만연해졌다. 신분의 고하에 따라 생활용품의 차별화를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던 당시의 신분제에도 일대 문란 현상이 초래되었다. 신라와 일본의 당국에서 국법을 개정하여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규제하려고도 하였으나 끝내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장보고는 어느덧 동아시아 최고의 거부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청해진의 군사력까지 겸유하였으니 그의 위력은 가히 한 나라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그의 위력은 ‘양 날의 칼’이었다. 무소불위의 위력은 자칫 자신을 베는 칼날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836년에 흥덕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족 간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제륭이 치열한 다툼을 벌인 끝에 제륭이 승리를 거두어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희강왕이다. 균정은 피살당했고 그를 따르던 아들 우징과 신하 김양 등은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장보고는 그들을 차마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여 보살폈다. 두목이 평가했듯이 장보고는 과연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차 838년에 희강왕을 추대한 김명이란 자가 희강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민애왕이다. 김우징과 김양은 장보고의 ‘의분(義憤)’에 불을 붙였다. 의롭지 못한 반역의 사태를 못본 채 하고 말 것이냐는 채근에 결국 설복당하여 그들에게 군사 5천을 내주었다. 장보고의 군사력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불의한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균정의 아들 우징을 새로운 왕으로 삼았다. 신무왕이다.

신무왕과 그의 자왕(子王) 문성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잇따라 임명하고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 왕비로 들이고자 하였다. 장보고의 위력을 우산 삼아 반역을 꿈꾸는 권신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권신 김양은 이에 위협을 느껴 장보고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장보고의 절친 염장을 꾀여 암살을 사주하였다. 장보고는 찾아온 염장을 반겨 맞아 술상을 마주했다. 염장은 모처럼 긴장을 풀고 만취한 장보고의 빈틈을 노려, 벽에 걸려 있는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동아시아 해상왕’ 장보고는 이처럼 허망한 최후를 마쳤다. 이후 염장은 10년 동안 장보고를 대신하여 청해진을 관장하였다. 이는 김양이 염장을 사주하면서 그에게 약속한 대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