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은 1909년 음력 5월 5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원광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중국 남경(南京)의 국립중앙대학 농학원 항해과 제3기생으로 입학하여 1930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중국 국영회사 초상국(招商局)에서 1년 간 실습하였다.
1931년 말 중국 해군부(海軍部)가 실시한 외국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독일 함부르크(Hamburg)의 아메리카 기선회사에서 승선 근무하였다. 1933년 상해(上海)로 귀환하여 해관(海關) 경비함에서 근무하다가 초상국의 상선으로 복귀하였다. 1935년 상해 해군해로측량국(海軍海路測量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사관생(士官生)으로서 다시 독일로 가서 항해학을 공부하였다.
1936년 초상국으로 복귀하여 중국 연안 여객선의 항해사 겸 부선장으로 근무하던 중 휴가차 개성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1941년 동화산업주식회사(東華産業株式會社)의 상해 출장소장이 되어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세인트존스대학 3학년에 특별입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그는 광복일인 1945년 8월 15일 서울로 귀환하였다. 귀국 직후인 1945년 11월 11일,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1)을 창설하고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1월,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하고 초대 교장과 해안경비대(海岸警備隊) 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9월에 해방병단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정식 발족되고, 9월 5일 손원일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였다.
해군창설 초기 1척의 군함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과 일본에 협상을 시도하여 1948년까지 총 37척의 군함을 인수하였다. 이후 함정건조기금을 모금하여 1949년 10월에 드디어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白頭山艦)2)을 미국에서 도입하였다.
오랜 식민지 끝에 광복을 맞이하지만 신생국가에 있어 군함이 전무하던 당시 ‘함정건조기금 갹출위원회’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벌이고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백두산함을 구입한 일화3)는 유명하다.
손원일은 6.25가 발발하자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9.28 서울 수복작전까지 직접 현장에서 진두지휘했다. 서울 수복작전에서는 국군 최고지휘관의 자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布告文)을 발표했다.
손원일은 전쟁 이후에도 해군력 증강을 위해 호위함을 추가로 인수하는 한편 군종제도 도입, 전사 편찬실 및 해군 음악대 등을 발족시켜 군의 사기진작과 현대화된 군 조직체계를 만드는데 노력하였다.
1953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제5대 국방부장관이 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장관 재임 중에는 국방력 증강 뿐 아니라 국립묘지 건립과 국방대학원(國防大學院 : 오늘의 국방대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1957년 초대 서독대사로 임명되어 3년간 활동하였다. 1970년 대한 윤활유 사장, 1972년 한국홍보협회장(韓國弘報協會長),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반공연맹(韓國反共聯盟 : 현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과 고문을 지내고, 1976년에 국제문화협회(國際文化協會)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국방, 외교 및 사회 각 분야에서 공헌하였다. 대한민국 해군 창설에 혁혁한 공을 세운 손원일은 태극 무공훈장 ‧ 미국 자유훈장 ‧ 미국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