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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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해양역사인물의 연재를 마치며 강봉룡(목포대 사학과 교수, 도서문화연구원장)

‘역사인물’ 앞에 ‘해양’을 붙인 ‘해양역사인물’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다. 육지에 편중되어 왔던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해양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왔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21세기 ‘해양의 시대’를 맞아 해양을 역사인식의 공간으로 적극 영입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해양재단이 ‘해양역사인물’을 선정하고 뉴스레터를 통해 연재해온 것은 아주 잘 한 일로 평가해야겠다.

해양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조선시대는 침체기였다. 조선은 바다를 금지하는 ‘해금정책’과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정책’을 폈다. 바다와 섬 사람들을 천시하는 풍조도 만연했다. 조선시대의 그러한 정책과 풍조는 부지불식간에 오늘날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 경계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 고려시대까지는 해양활동이 활발했고, 국가도 이를 지지하고 지원했으니, 이를 적극 계승할 일이다. 이번 17인의 ‘해양역사인물’ 선정과 연재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해양사의 굴곡이 잘 나타나고 있어 흥미롭다.

  • 연재는 백제의 근초고왕으로부터 시작했다.


    연재에서 그는 4세기 후반 연안해로를 통해 ‘중국(동진)-한반도(백제)-일본열도(왜)’를 잇는
    동아시아 해상문물교류를 주도했던 인물로 그려졌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삼국이 치열하게 다투는 시대였으니, 그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 4세기 말에 출현한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대륙을 석권하고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해로
    주도권을 앗아갔다.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왕의 해양 정복, 이것이 두 번째 연재의
    골자
    였다. 이어서 세 번째 연재는 6세기 신라에게 동해와 남해의 해양 주도권을 선사한
    이사부의 해양활동에 관한 이야기로 꾸며졌다.

    이렇듯 삼국의 해양 경합은 엎치락뒤치락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삼국 간의 상쟁은 동아시아 연안해로를 경색시켰고, 급기야 당나라와 왜(일본)의 개입을
    불러와 삼국 간 전쟁은 ‘동아시아 대전’으로 확전되었다.

  • 네 번째 연재의 주인공인 문무왕은 압도적인 해양력을 앞세워
    삼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이어 당의 해양 침략을 막아내고
    일본의 호시탐탐을 제압하여 ‘동아시아 대전’의 최후 승리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문무왕의 해양전략을 충실히 따라 해전에
    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수군제독도 다수 배출하였으니, 그중
    676년 기벌포해전의 영웅 김시득을 다섯 번째 연재의 주인
    으로 삼았다.

문무왕은 치열했던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선박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선부’를 국가 최고 기관으로 발족하여 이후 도래할 평화의 시대의 국제 해양교류를 주도할 굳건한 기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신라를 해양강국으로 나아가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니,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8세기 전반 육로와 해로를 섭렵하며 동아시아는 물론, 서아시
    아와 중앙아시아를 망라하여 아시아의 해륙을 종횡무진 누볐
    던 해초스님의 국제 문화교류활동과 9세기 초에 완도 청해진
    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석권했던 장보고의 국제 해
    양활동은 문무왕이 준비한 신라의 해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혜초와 장보고 두 분을 여섯 번
    째, 일곱 번째 연재의 주인공
    으로 모셨다.
  • 한편 왕건은 장보고의 동아시아 해양 잠재력이 결집되어 있던 영산강유역과 서남해를 장악
    함으로써 고려를 건국하어 후삼국을 통일하고 해양강국의 토대를 굳건히 할 수 있었으니, 장보고
    의 뒤를 이은 해양역사인물의 여덟 번째 연재 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고려를 해양강국으로 발전시켜 간 적절한 후보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고려 말기 왜구 침탈을 제압하고 몽골 잔존세력이 일으킨 제주도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해양작전을 감행했던 최영, 그리고 화약무기를 개발하여 왜구를 토평한 진포대첩의 영웅 최무선을 고려를 대표하는해양역사인물로 기용하는데 그쳤다.

초강대국 몽골제국에 저항하며 ‘해양왕국’의 재건을 시도했던 삼별초 영웅들의 해양활동을 조명하지 못한 것 역시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해양활동의 역동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국가가 해양을 금기시하였으니, 이는 조선의 국왕이 해양역사인물로 선정되지 못한 이유이다. 조선시대의 해양역사인물로는, 불가항력의 해난사고로 국내외로 표류당하여 저 바다 밖 피안의 세계 경험을 소개한 최부와 문순득, 국가에 중죄를 지어 섬으로 유배당하여 ‘자산어보’라는 의외의 해양성과를 이루어 낸 정약전 등이 우선 떠올라 이들을 연재의 주인공으로 소개하였다. 다만 역동성 보다는 무언가 불가피의 피동성이 느껴지는 것은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국가가 방기하거나 소홀히 한 바다나 섬을 지켜낸 역사인물의 영웅담은 그나마 조선의 해양사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위안 요소이다.

16세기 말 기적 같은 해전의 승리를 잇따라 일궈내, 또 한번의 ‘동아시아 대전’의 태풍에 휘말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던 나라를 구해낸 이순신은 말할 것도 없고, 17세기 말 일본인의 침탈에 맞서 무방비 상태에 처해있던 독도를 혈혈단신으로 지켜낸 울릉도의 민간 영웅 안용복의 이야기는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조선은 이들의 공적을 인정하기는커녕 그들의 죄를 논하기에 바빴으니, 역시 조선 국가의 해양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에 대사변이 잇따라 밀려오는 상황에서 국가보다는 민간인의 활약상이 당분간 두드러졌다.

본문참조
  • 제주 잠녀 항일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해녀 김옥련은 1909년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9살때부터 물질을 하여 집안 살림을 도왔다.
  • 한국전쟁 중이었던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 수호를 위한 군인과 경찰 파견이 불가능했다. 그러자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
  • 1945년 광복과 함꼐 우리나라는 일제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지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갖은 술수를 부리는 일본에 계속 시달렸다.

일제의 해양 침탈에 맞서 싸운 김옥련 등의 제주해녀들과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일본의 침략에 국가가 미처 손쓰지 못했던 독도를 다시 한번 지켜낸 울릉도 민간 영웅, 독도의용수비대 대장 홍순칠 등의 그들이다. 김옥련과 홍순칠의 두 이야기로써 우리나라 해양역사인물 연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섬과 바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극적 효과와 함께 잔잔한 여운을 전해 준다. 바다는 우리의 소중한 영토이며 세계와 이어주는 통로이다. 섬은 그런 바다의 지킴이이며 거점이다.

해양역사인물의 연재를 통해서 이러한 바다와 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다. 역사의 되새김이 현재와 미래로 투영되어 실천적 의지로 이어질 때 그 의미는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는 1996년에 5월 31일을 국가기념일 ‘바다의 날’로 지정하여 바다의 의미와 가치를 국가적 차원에서 선양해 오고 있다.

또한 올해 2018년에 8월 8일을 국가기념일 ‘섬의 날’로 확정하였으니, 바다의 친구 섬을 비로소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서 거듭 선양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족을 덧붙인다. 섬에 대한 영어 ‘island’는 물(바다)을 뜻하는 ‘is’와 땅(육지)를 뜻하는 ‘land’의 합성어이다. 즉 섬(island)은 ‘일정한 바다(is)를 포괄하는 특별한 땅(land)’인 셈이다. 유엔해양법협약 제121조는 island(섬)에 대하여 엄청난 바다의 권리(영해, 접속수역, 배타적경제수역 등)를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는 ‘독도는 우리 땅(iand)’이라 부르지 말고 ‘독도는 우리 섬(island)’라 불러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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