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독도를 지킨 사람들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 닫는 따옴표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

홍순칠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탈과정에서 가장 먼저 빼앗긴 영토이다. 1905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 감시를 위해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인 어부 나카이는 독도 강치잡이 독점권을 대한제국에 신청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절차 교섭을 협의하였다. 나카이로부터 내막을 들은 일본 해군성과 외무성은 독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지지 선점론(주인이 명확하지 않은 땅은 선점하는 나라의 영토가 된다는 주장)을 내세워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려 하였다. 마침내 일제는 1905년 1월, 독도에 다케시마라는 새 이름을 붙여 오키 섬의 관리 아래 둔다고 결정하였다. 일본은 독도 침탈을 첫 단추로하여 1910년에는 대한제국 전체를 식민지로 삼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는 일제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다.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낸 연합군 총 사령부는 이른바 ‘맥아더 라인’을 선정하여 일본의 어업 가능 구역을 제한하였는데, 이 때 독도는 일본의 경계선 밖에 있는 명백한 한국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가 자국의 영토인 것처럼 미공군에게 폭격연습장으로 제공하였다. 이 때문에 1948년 6월 8일에는 독도에 고기잡이 나간 울릉도 어부들이 미 공군의 포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정부는 도해의 어족 자원 보호와 독도 수호를 위해 국무원 고시 제41호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통칭 평화선 선언)을 발표하였다. 평화선은 한국 영토인 독도와 일본 영토인 오키섬의 중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선 선포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1953년 6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관리들과 청년들을 태운 순시선이 독도에 상륙하여 우리나라가 세운 영토 표석과 조난 어민 위령비를 파괴한 후 일본 영토 푯말을 세워놓고 달아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정부는 전쟁 중에 있어 일본의 불법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온 국토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독도 수호를 위해 군인이나 경찰을 파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에 울릉도 주민들은 홍순칠을 대장으로 하여 독도 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 수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은 1929년 1월 23일, 경상북도 울릉군에서 태어났다. 울릉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광복 후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었다. 22살이 되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홍순칠은 크고 작은 전투에 여러 차례 참전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의 원산 부근에서 부상을 입고, 1952년 7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달 8월에 재향군인회 울릉도연합 분회가 결성되자 그는 울릉도연합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도모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미역 채취를 위해 독도에 간 그는 일본 경비정과 어선들이 독도를 드나들며, 자기들의 영토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본인들의 행위에 분노한 그는 뜻이 맞는 상이군인들을 모아 독도 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편제는 군인 출신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이었으며,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중기관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등이었다. 당시 독도 의용수비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았다.

수비대장 : 홍순칠 / 수비대부대장 : 황영문 / 제1전투대 대장 : 서기종 / 제2전투대 대장 : 정원도 / 후방지원대 대장 : 김병열 / 교육대장 : 유원식 / 보급대장 : 김인갑

독도 의용수비대는 개인적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무기를 구입하기도 하고, 일본을 위협할수 있는 가짜 무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가 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일본 측에서 독도에 보낸 경비정이 무장을 하고 독도 상륙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독도 의용수비대의 대부분이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무기를 다루거나 전술을 운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무기를 기반으로 오게(大毛) 수산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의 150m 지점에서 나포하기도 하고,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순시선을 선제 공격하여 돌아가게 하는 등 1954년 12월 30일 독도 경비를 경찰에 넘길 때까지 독도 수호운동을 전개 하였다. 지금도 독도 동도 바위 벽에는 그들이 새겨놓은 ‘(한국령)’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남아있다.
독도 의용수비대가 해산할 때까지 남은 대원들은 33명이었는데 경찰의 요청에 따라 그 중 일부가 경찰관으로 특채되었다. 홍순칠은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울릉도로 돌아왔다. 그 후 홍순칠은 1957년 3월 1일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1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66년 4월 12일에는 국가로부터 5등 근무 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1966년 9월 4일 서도 물골에 급수장 시설 확장을 수로 탱크로 설치하였고, ‘푸른 독도 가꾸기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도에 대한 애정을 쏟다가 1986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996년 4월에 보국 훈장 삼일장을 추서하였고, 2005년에는 특별법의 제정에 따라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독도 의용수비대가 해산할 때까지 남은 대원들은 33명이었는데 경찰의 요청에 따라 그 중 일부가 경찰관으로 특채되었다. 홍순칠은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울릉도로 돌아왔다. 그 후 홍순칠은 1957년 3월 1일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1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66년 4월 12일에는 국가로부터 5등 근무 공로 훈장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1966년 9월 4일 서도 물골에 급수장 시설 확장을 수로 탱크로 설치하였고, ‘푸른 독도 가꾸기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도에 대한 애정을 쏟다가 1986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996년 4월에 보국 훈장 삼일장을 추서하였고, 2005년에는 특별법의 제정에 따라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홍순칠과 독도의용수비대

여는 따옴표 홍순칠이 주도한 독도 의용수비대의 독도 수호 활동은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독도를 수호한 좋은 선례가 되었다.
이처럼 민간인들이 중심이 되어 펼친 독도 수호활동은 대한민국 독도 영유권을 확인하는 데 결적적인 역할을 하였다. 닫는 따옴표

동도 정상에서 경계 관측 활동을 하는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의용수비대가 새긴 '한국령' 각자
< 독도 정상에서 경계 관측 활동을 하는 독도의용수비대 > < 독도의용수비대가 새긴 ‘한국령’ 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