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다, 제주 해녀
   김옥련 닫는 따옴표

문경호(공주대 교수)

김옥련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장기(포항)로 유배 갔던 시절에 해녀를 보고 읊은 ‘아가사(兒哥詞)’라는 시의 일부이다. 이 시에는 권세가들의 주안상에 오를 전복을 따느라 목숨을 걸고 물질을 하는 당시 해녀들의 고달픈 삶을 잘 그려져 있다. 같은 시기 제주도 해녀들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억척같이 물질하는 해녀들이 역사의 정면에 등장한 사건이 있었다. 1932년 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해녀 항일투쟁이 그것이다. 수천 명의 제주 해녀들은 일제의 수탈과 압제에 맞서 전복을 딸 때 쓰는 쇠 갈고리 ‘빗창’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녀들의 항쟁은 무려 3개월 간이나 지속되었으며, 참여한 연 인원은 1만 7천명이나 되었다. ‘제주 잠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중심에 김옥련이라는 해녀가 있었다.
김옥련은 1909년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서문동에서 1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제주도 여성들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바다 속을 드나들며 물질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왔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 동쪽의 토지는 척박하기 짝이 없어 여성들이 물질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옥련의 부모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김옥련은 야학에라도 나가 공부를 하려했지만 이마저도 부모의 반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모 몰래 울타리를 넘어 야학에 나갔다가 부모에게 들켜서 모질게 매를 맞기도 했다. 야학에서는 주로 노동독본이나 산술, 글쓰기 등을 배웠는데, 그것은 훗날 그녀가 일제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녀는 야학교사 오문규, 김순종 등의 지도 아래 또래 소녀들과 함께 ‘소녀회’에서 활동하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회를 하기도 하고, 밤마다 바닷가에 모여 일본인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안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제주 해녀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의 횡포와 수탈에 시달렸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총독부로부터 독점권을 얻어서 해녀들이 목숨 걸고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감태와 전복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특히, 그들은 감태나 전복을 사들여서 말렸다가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전복 값을 절반으로 깎아 내리거나 아예 사주지도 않았다.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에 전복이 2~3배나 더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감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본래는 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베어온 감태와 파도에 밀려온 감태를 같은 값으로 매수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독점권을 얻은 일본 상인들은 파도에 밀려온 감태가 품질이 낮다는 이유로 아예 받지도 않았다.

일본인들의 횡포에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제주 해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제주 해녀 어업조합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녀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해녀조합은 어용단체가 되어 오히려 해녀들을 더 억압하고 탄압하였다. 이에 김옥련을 비롯한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맞서 해녀회를 조직하여 그녀들의 권리를 지키려 하였다.

그러던 차에 1931년 중반 즈음에 사건이 터졌다. 그 때도 해녀 조합은 제주 하도리 해녀들이 바다에서 따 온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해녀 조합은 어쩔 수 없이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약속을 실행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도리의 해녀들은 해녀조합의 횡포와 무성의에 반발하여 집단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하였다.

1931년 12월 20일, 김옥련을 비롯한 제주 하도리 해녀들은 오문규의 지도 아래 12개의 투쟁 조항을 마련하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녀들은 일본 경찰과의 충돌을 피해 통통배를 타고 제주읍으로 가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길이 막혀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따라 그녀들의 투쟁은 자연히 이듬해로 넘어갔다. 1932년 1월 7일, 김옥련과 해녀들은 세화 장날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녀들이 해녀조합의 부조리를 규탄하자 그에 공감하는 해녀들이 합세하면서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시위 행렬이 구좌면 사무소에 이르자 면장이 직접 그녀들을 만나 자신이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해녀들은 면장의 말을 믿고 일단 해산하였다.

김옥련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구좌면장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해녀조합 역시 기존의 방침대로 감태와 전복을 헐값에 사들이려 하였다. 이에 김옥련, 부춘화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해녀 시위대는 1월 12일,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 겸 제주도 해녀조합의 조합장인 다구치가 순시를 위해 구좌면을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세화장터로 몰려갔다. 이때 모인 해녀 100여명은 다구치가 탄 차가 구좌면에 이르자 호미와 빗창을 들고 차를 에워쌌다. 김옥련은 도사의 차 위에 올라서서 12가지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따졌고, 부춘화는 담장에 올라서 결의문을 낭독했다. 시위대의 험악한 기세에 눌린 다구치는 5일 안에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난 다구치는 약속과 달리 5일이 지나고 나서도 일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시간이 점차 흘러가고, 해녀들의 요구조항이 하나도 실행되지 않자 해녀들은 또다시 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제주도사는 무장 경관대를 출동시켜 주동인물들을 잡아들였다. 이로 인해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청년 수십 여 명이 강제로 연행되었다.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체포하러 온 일본 경찰에 맞서 항의를 벌이기도 하였으나 지원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됨으로써 결국은 무산되었다. 김옥련은 제주 해녀 운동의 주동자로 몰려서 결국 6개월 간의 옥살이를 했다.

여는 따옴표 제주 해녀 항일운동은 주동자들의 검거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무산되었으나 하층민으로 인식되어 온 해녀들이 주도한 항일 투쟁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중심에는 야학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애국심을 키운 제주의 여성 항일 운동가 김옥련이 있었다. 닫는 따옴표

제주항일운동기념탑
< 제주항일운동기념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