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함포로 왜구를 격파하다
   최무선 닫는 따옴표

윤용혁(공주대 명예교수)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화약무기를 개발하여 고려 말 창궐하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고려에서 화약무기의 개발과 생산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377년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이다. 당시 고려는 연이은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외적의 침입은 북방으로부터의 육로를 이용한 보병과 기병 군사의 침입이였고, 이같은 전투에 오래 익숙해 있던 탓에 고려는 해안과 강을 이용한 왜구의 벌떼 같은 전방위적 침입을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여 섬과 해안의 주민을 내륙으로 옮기게 하는 등 소극적인 방책을 일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최무선은 해전에서 왜구 선단을 바로 격파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화약무기의 활용이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최무선은 원의 상인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어 화약무기 제작의 핵심 기술인 염초제조법을 익히게 되었으나, 화약무기 제작 사업은 결국 국가적으로 추진해야할 사업이었다. 화약무기 제조법의 개발을 계기로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이 1377년(우왕 3)의 일이다. 이듬해 화약무기 발사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을 조직하여 화포의 개발과 함께 실전에서의 투입을 모색하였다. 왜구를 계기로 고려에서 화약이 실용화 단계에 들어서 있었던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최무선
최무선 화약무기 개발 모습

화통도감에서는 도합 18가지의 총포가 개발되었다. 총·통() 등의 소형화기, 통(?) 류의 중형화기, 그리고 포()로 기재된 중화기 등 다양한 화약무기가 생산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기 도입은 군선 건조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화기를 군선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를 장착하는 시설이 필요하고 화포 사용에 따른 선체 진동을 완화시키거나, 선내에 화약 보관시설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 등이 지휘하는 우왕 6년(1380) 8월의 진포대첩은 개발된 화약무기를 해전에서 직접 사용한 첫 시험장이었다. 이때 왜구들은 금강을 거슬러 부여, 청양, 공주 등 내륙으로 진출하여 충남 일대에 출몰하고 있었다. 최무선 등의 고려 수군 1백 척은 금강 하구인 진포에 정박한 5백 척 규모의 왜구의 대선단을 공격하였다. 5배나 많은 적을 공격한다는 것은 화약무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진포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위력을 발휘한 것이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무기였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배를 지키던 적병은 거의 타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고 당시의 상황이 <고려사>에 묘사되어 있다.

처음 개발된 당시의 화포는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이기보다는 목표물을 불태우는 화공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몇 년 후, 남해도 관음포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는 해상에서 이동하는 왜구 선단을 공격하여 제압하였다. 최무선은 이 해전에도 참전하여 화포를 적극 운용하였다. 최무선에 의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군사 기술 발전은 왜구에 대한 방어전을 공격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경상도 원수 박위에 의한 쓰시마 정벌도 바로 이러한 공격 전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화약무기의 개발은 조선시대에 들어가 더욱 괄목할 발전을 이루었다. 임진왜란에서 이 화포의 위력이 왜군을 막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 점에서 최무선의 공헌은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건국 이후 본격적인 수군제도의 편성이 이루어졌던 것도 화약무기 사용에 의하여 전문적 수군의 운용이 유효하다는 점이 입증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여는 따옴표 화포를 군선에 장착하여 해전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는 점에서
최무선의 화포개발은 그 군사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닫는 따옴표

군산의 진포대첩 기념탑 < 군산의 진포대첩 기념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