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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혁(공주대 명예교수)

최영(1316-1388)은 고려 말을 대표하는 최고의 정치가이자, 무반 장군이다. 나이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그때 아버지의 유훈(遺訓)이 바로 “너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이 말을 깊이 새기고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이 초라하였으나 그 곳에 만족 하였으며,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여 식량이 모자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지배 계층과 권력자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토지와 노비를 늘리는, 이른바 물신(物神) 풍조에 물들어 있을 때 최영은 엄동 속의 푸른 소나무처럼 지도자로서의 품격과 청렴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최영의 명성은 전란 속에서 다져졌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 미증유의 전란을 당하였을 때, 언제 어디서나 승리하는 무적의 지휘관이었다. 그의 승전 비결은 위기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기질과 엄격한 규율이었다. 최영이 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59년부터 시작된 홍건적의 침입 때였다. 홍건적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대표적 농민 반란군 집단이다. 2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홍건적에 의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한때 안동까지 피란하는 등 고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최영은 이때 안우, 이방실 등 장군과 함께 개경 수복 작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최영의 명성을 알린 것은 왜구의 침입 때였다.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한 전투 가운데 특히 널리 알려진 것이 1376년 부여에서 벌어진 홍산대첩이다.

최영
최영 전투모습

1376년(우왕 2) 왜구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 공주를 함락하고 연산 개태사를 도륙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공주 목사 김사혁이 적을 맞아 싸우다 참패하였고, 양광도 원수 박인계가 사살 당하는 낭패를 보았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보잘 것 없는 왜적이 이처럼 난폭하니 이제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에는 더욱 대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출정을 간청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이미 60을 넘어서 전선에 직접 출정하기에는 이미 적합하지 않은 나이였다. 가까스로 출정을 허락받은 최영은 왜군을 홍산(부여)에서 만나 대파하였다. 당시 모든 장수들이 겁을 먹고 망설이고 있을 때 최영은 몸소 선두에 서서 돌진하였다. 적은 바람에 풀잎이 쓰러지듯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최영은 입술에 화살을 맞았으나 개의치 않고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 적을 압도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은 최무선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의 남해대첩과 함께 고려 말 왜구토벌의 대표적인 승첩 사건으로 꼽힌다.

여러 전투 가운데 최영을 해양 군사 전문가로 각인시킨 전투가 있다. 홍산대첩 직전인 1374년 314척의 군선에 2만 6천 병력을 동원한 탐라(제주) 정벌이 그것이다. 1273년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패망한 이후 이곳은 한동안 몽골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인 공민왕 23년(1374) 명에서 제주의 말 2천 필을 요구해 왔다, 그 사이 원() 제국은 새로 일어난 한족왕조 명(明)에 의해 멸망하였지만(1368), 제주도에는 원에 의해 심겨진 '목호(牧胡)'들이 토착화하여 지배권을 가지면서 고려 조정의 요구에 반발하였다. '목호'라는 것은 일종의 목축 관리자들로서, 원의 목마장 설치와 함께 제주에 들어온 몽골인이었다.

제주 목호의 반발에 대하여 고려 조정은 이번 기회에 이들 세력을 제거하고 중앙정부의 지배권을 제주에 확실히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정부는 최영을 도통사에 임명하여 진압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제주 목호를 정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군사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군선이 314척, 군대가 무려 25,605인이었다. 삼별초 진압을 위하여 제주에 파견된 여몽군의 규모가 군선 160척, 병력 1만 2천이었던 것에 비하여, 목호의 란 진압을 위하여 동원된 병력의 규모는 그 2배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1374년 7월 23일 명을 받은 최영은 8월 초 나주 영산포에서 열병하고, 보길도를 거쳐 8월 28일 추자도를 출발하여 제주도의 명월포(한림읍)에 상륙하였다. 목호의 거점이었던 동, 서아막은 성산리 수산리와 한경면 고산리 일대로 추정되는데 최영의 진압군이 명월포로 상륙한 것은 고산리 일대에 거점을 둔 서아막이 공격의 1차 목표였음을 암시한다. 최영의 군이 명월포에 상륙하자 서아막의 하치(哈赤)인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普) 등이 기병 3천을 포함한 부대를 끌고 나왔다. 치열한 싸움 끝에 고려군은 서아막의 군을 한라산 남쪽으로 밀어붙였다. 목호 군이 서귀포 해안의 범섬으로 몸을 피해 들어가자 최영의 군은 이를 포위하여 함락하였다. 이어 동아막의 하치(哈赤) 석다시만(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의 군을 무너뜨리고 이를 제압하였다. 이로써 목호란은 진정되었고, 원 간섭기에 부식되었던 몽골 세력은 고려에서 마지막으로 그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우왕대 연이은 왜구 침입을 막은 공으로 최영은 문하시중의 벼슬에 올랐지만, 원을 대신하여 중원을 지배하게 된 명의 압박이 고려에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되었다. 1388년 명은 철령위를 설치하고 고려가 원으로부터 회복한 변경 지역을 명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에 최영은 요동 정벌을 위한 4만 군의 팔도 도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체포되어 참수되고 만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사실상 그 명을 다하게 되고 1392년의 조선 건국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장군이 죽던 날 개경 사람들은 시장을 모두 닫았으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부녀자나 어린이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한다. 외세를 막은 장군의 위업도 위업이려니와, 장군의 청렴결백한 인품은 무엇보다 물질만능의 세태에 물든 오늘의 우리 세대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최영장군이 상륙한 제주 명월포 해변 < 최영장군이 상륙한 제주 명월포 해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