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역사인물소개 처음으로
여는 따옴표 해로와 육로로 아시아를 섭렵한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慧超) 닫는 따옴표

강봉룡(목포대 사학과 교수, 도서문화연구원장)

혜초

혜초 하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책이 떠오른다. 그 시절 인도 대륙은 흔히 5개의 천축국으로 구분하여 불렸으니, 『왕오천축국전』은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대륙의 각처를 순례하고 저술한 기행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원래 저자와 이름만 전할 뿐 실체를 알 수 없는 전설상의 여행기였다.

8세기 말 혜림(慧琳)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란 책에서 『왕오천축국전』이 혜초의 저작이고, 상·중·하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내용도 알 수 없었고, 혜초가 어느 나라 사람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후 1,100년을 훌쩍 뛰어넘은 1908년에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펠리오(Paul Pelliot)가 중국 깐수성(甘肅省) 둔황(敦煌)의 막고굴(11호굴)에서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를 발견하고, 이것이 이름으로만 전하던 『왕오천축국전』의 일부임을 밝혀내면서 비로소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은 원본이 아니고 요약본이다. 그것도 앞뒤가 잘려나가 원본의 1/6 정도의 분량에 불과한 227행 6,000여 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 발견으로 수수께끼의 책 『왕오천축국전』과 저자 혜초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점차 그 정체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혜초가 신라인임이 확인되었다. 중국 밀교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불공(不空)이 입적할 때 그의 6대 제자 중 ‘신라 혜초’를 두 번째로 거명했던 유언 기록이 찾아졌다.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에서도 저자인 혜초가 스스로 ‘계림’ 사람임을 밝힌 대목이 확인되었는데, 당시에 ‘계림’은 신라의 별칭으로 널리 불리고 있었다. 혜초의 국적과 함께 행적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704년에 신라에서 태어난 혜초는 16세 되던 719년에 해로를 통해 당의 광저우(廣州)로 건너갔다. 경주의 외항인 울산을 출발하여 남서해의 바다와 흑산도를 거쳐 중국 닝포(寧波)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다시 뱃길로 광저우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닝포는 신라 및 일본과 통하는 가장 중요한 항구였고, 광저우는 동남아를 통해 인도로 통하는 거점 항이었다.

그는 광저우에서 중국 밀교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와 그의 제자 불공(不空)과 같은 저명한 불승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기도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를 직접 순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723년에 광저우를 떠나 험난한 순례의 길에 나섰다. 인도에 이른 길 역시 해로였다. 광저우를 출항한 혜초는 하이난도(海南島)에 이르고 다시 중국 동남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베트남 북부의 모처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베트남의 여러 항구를 거쳐 스리위자야 왕조(지금의 수마트라섬)의 항구에 기항하여 상당 기간 체류하였다. 이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고 미얀마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마침내 인도 동북부에 상륙하였다.

여기에서 혜초는 육로를 통해 순례여행을 본격 시작하였다. 먼저 그는 인도 전역(오천축국)을 순례하였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슬람의 이교도가 지배하는 페르시아(이란)와 대식국(이라크)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문득 방향을 돌려 중앙아시아 내륙지역의 여러 나라를 거치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치명적인 ‘모래의 강’을 통과하여 4년만인 727년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안에서 그는 금강지와 불공과 재회하여 50여년 간 천복사, 대흥선사 등지에서 그들에게 사사받고 밀교의 경전 번역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중국의 밀교 발전에 헌신하다가 780년에 문득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이렇듯 혜초는 불교의 진리를 찾아 해로와 육로를 섭렵하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망라하는 아시아 전대륙을 종회무진 누볐다. 인도의 불교 성지순례에 한정하지 않고 이슬람문명과도 조우했다. 종교적 관심에만 치우치지 않고, 방문한 여러 나라들에 대하여 왕성의 위치와 규모,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음식과 의상, 풍습과 언어 등을 포괄하는 종합 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혜초의 순례여행

혜초가 살았던 8세기는 동아시아에서 당을 중심으로 유교문화권이 결성되었고, 서아시아에서 이슬람문화권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두 문화권 사이에 해로와 육로를 통한 문명교류가 본격화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혜초의 여행은 8세기의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흐름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혜초는 8세기 동서문명교류의 선봉에 섰던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혜초

1999년 문화관광부는 혜초를 그해 ‘2월의 인물’로 지정하여 선양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0년 말에서 2011년 초까지 4개월 간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과 고대 동서문명교류를 대변하는 둔황의 유물들을 대거 임대하여 전시하는 특별기획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특별기획전의 주제는 ‘1283년만의 귀향’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단 <실크로드와 둔황>이었다. 혜초가 장안으로 귀환한 727년에서 2010년까지의 1283년을 주목한 것이다.

여는 따옴표 비록 16살의 어린 나이에 신라를 떠나 끝내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중국 오대산에서 최후를 마쳐야 했지만,
혜초가 스스로 ‘신라인’임을 자부하고 이를 주위에 주지시켜서 기록으로 남게 했던 것은 가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닫는 따옴표

1908년 둔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 < 1908년 둔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왕오천축국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