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1여개의 해양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전체 인물 목록
전체 인물 목록 닫기
                                                        남구만[南九萬]
                                                        출생~사망 : 1629~1711년 (관직:교리, 대사성, 안변부사, 함경도관찰사, 형조판서, 영의정)
                                                        공격기병대로 해안을 지키자
                                                        조선조 숙종 때 영의정으로 있던 남구만은 강원도 관리를 차출하고 “그에게 친히 섬 안으로 들어가서 그 형세를 살펴보게 한 뒤에 혹 백성을 모아서 들어가게 하거나, 혹은 진(鎭)을 설치하고 막아 지키게 하여 뒷날 곁에서 엿보는 근심을 막는 것이 일에 마땅할 듯하다”고 상소하였다. 그의 제의에 따라 조정에서는 3년마다 수토관을 울릉도에 파견하는 수토정책(搜討政策)을 제도화하였다.1) 남구만의 제안으로 시행된 수토정책은그 동안 방치되었던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해 조선 정부가 최초로 국가권력을 동원하고 행동으로 옮긴 정책이었다.
                                                        병조판서 시절에도 남구만은 해적활동에 대한 대비책으로 “상륙한 적을 해안에서 즉시 격파하려면 기동성이 있는 기병대가 필요하며, 함경도에 있는 친기위(親騎衛 : 1684년에 국경 ‧ 함경도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기마부대를 지칭)를 모방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에도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창설”할 것을 제의하였다.2) 이를 계기로 각도에 정예 공격기병대가 조직되고 해방체제(海防體制)는 한층 강화되었다.
                                                        남구만은 문신이자 정치가로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다. 효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1657년 정언(正言 :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6품 관직)이 되었다. 1679년 한성부 좌윤을 지내면서 당시 남인들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거제도와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680년 도승지로 복귀하였고 대제학 ‧ 병조판서 ‧ 좌의정 ‧ 영의정을 지냈다.
                                                        1681년 일본 에도 막부의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 1646~1709)의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701년 무고의 옥(巫蠱之獄 : 신사옥사, 신사환국은 1701년 희빈 장씨가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알려진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첨부파일 :  
                                                        badge
                                                        Q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해양재단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