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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인귀[薛仁貴]
                                                        출생~사망 : 613~683년 (관직:우령군랑장)
                                                        고구려와 신라를 공략하다
                                                        설인귀는 당나라 초기의 장수로, 이름은 설례(薛禮), 자는 인귀(仁貴)로 통상 ‘설인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고구려를 침공하고 신라를 공략하면서 전투경력을 쌓았다. 고구려를 침공할 때 그는 기존의 기병 위주의 군대운용에서 육지와과 해상을 동시에 활용하는 군사사상(軍事思想)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신으로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군졸(軍卒)로 지원하고,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발탁되었다. 659년 우령군랑장(右領軍郞將)에 봉해진 그는 양건방(梁建方)、계필하력(契必何力)과 함께 고구려에 침입하여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666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와 구원을 청하자, 그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요동안무대사(遼東安撫大使)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도와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인귀는 당나라 기병을 누선에 태우고 서해상으로 신속하게 이동시켜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그는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巖) 3개성을 함락시켰다.
                                                        668년 당나라는 이적(李績)을 대총관(大總管)으로 삼아 신라와 함께 고구려로 진공하였다. 설인귀는 연해(沿海)로 진출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 이적의 병사와 합세하였다.
                                                        고구려가 항복한 후 당 고종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1)를 설치하고 설인귀와 유인궤(劉仁軌)에게 병사 2만으로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설인귀에게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을 제수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하면서 안동도호(安東都護)를 겸하게 하였다.
                                                        671년에는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이 되어 신라를 침공했다. 이때 설인귀는 신라승 임윤법사를 통해 문무왕에게 최후통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왕은 안전한 터전을 버리고 멀리 천명(天命)을 어기고, 천시(天時)를 무시하고, 이웃나라를 속여 침략하고, 한 모퉁이 궁벽한 땅에서 집집마다 병력을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서 과부가 곡식을 운반하고, 어린아이가 둔전(屯田)하게 되니 지키려도 버틸 것이 없고, 이는 왕이 역량을 모르는 일입니다. 인귀(仁貴)는 친히 위임을 받은 일이 있으니 글로 기록하여 (황제에게) 아뢰면 일이 반드시 환히 풀릴 터인데 어찌 조급하고 스스로 요란하게 합니까. 교전 중에도 사신은 왕래하니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2)
                                                         
                                                        675년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676년 11월에는 그가 이끄는 수군 함대가 기벌포로 침공하여 사찬(沙飡) 시득이 이끄는 신라 함대와 싸웠다. 이 해전에서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가 있었으나, 설인귀의 수군 4,000여 명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81년 설인귀는 과주자사(瓜州刺史), 대주도독(代州都督)에 오르고 이듬해 돌궐을 격퇴하여 본위대장군(本衛大將軍)으로 승진하였다. 고구려와 신라 공략에 앞장섰던 설인귀는 한반도 민간설화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683년 그가 죽자 한반도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된 유래가 다수 유포되었고 사적비도 곳곳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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