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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만철[薛万徹]
                                                        출생~사망 : ~653년 (관직:차기장군)
                                                        해상 원정작전을 시도한 차기장군
                                                        설만철은 당나라의 군인으로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출신으로 탁군태수(涿郡太守) 설세웅(薛世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설만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주(幽州)에 있으면서 유주총관 나운(羅芸)과 친교를 맺고, 그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하여 차기장군(車騎將軍)에 오르고 무안현공(武安県公)에 봉해졌다. 
                                                         그 후 황태자 이건성(李建成)을 섬겼다. 626년 현무문(玄武門)의 변(變)1)이 일어나자 그는 동궁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다가 설득을 당하고 당 태종 이세민의 휘하로 들어갔다.
                                                         630년 명장 이정(李靖)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공격할 때 공을 세워 통군(統軍)에 임명되고 군공(郡公)의 작위를 받았다. 이정이 토욕혼(吐谷渾)을 토벌할 때에도 그는 기병(騎兵)을 이끌고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당 태종은 634년에 이정을 시켜 설만철과 함께 고구려 정벌을 추진하였다. 지상전에 익숙한 이정은 육지로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였으나 설만철은 함선을 타고 서해로 이동하는 공격하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구당서(舊唐書)설만철(薛万徹) 전에 따르면, 그는 기병전의 명수로 돌궐과의 전투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당군을 승리로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장이었으며 648년 고구려 정벌에 있어 당나라 군대를 함선에 태우고 바다로 원정작전을 시도하였다.
                                                         당 태종이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설만철은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수나라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요동전투에도 검남은 참여하지 않아서 그 백성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당 태종은 그의 말에 따랐다.
                                                         648年 설만철은 청구도행군(青丘道行軍) 총관,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이 부총관이 되어, 3만 명의 병력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래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하였다. 

                                                         “648년 6월 설만철의 함대가 압록강 입구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배행방의 공격으로 패하였다. 당군은 박작성을 포위하였으나, 지형의 험준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성, 안시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대응하니 고구려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2)

                                                         651년 영주자사(寧州刺史)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설만철은 방현령(房玄齡)의 차남 유애(遺愛)와 함께 형왕(荊王) 이원경(李元景)을 옹립하려다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653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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