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1여개의 해양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전체 인물 목록
전체 인물 목록 닫기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Alfred von Tirpitz]
                                                        출생~사망 : 1849~1930년 (관직:해군장관)
                                                        해군력 증강에 헌신한 해군장관
                                                        그는 독일의 해군제독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7년 동안 빌헬름 2세(William II) 치하에서 해군력을 증강시킨 주요 인물이다. 1900년 귀족이 되었고, 1903년 해군제독의 지위를 얻었다. 1911년 대 제독(Grand Admiral)의 지위에 오른 뒤 활약하다가 1916년 퇴역했다.
                                                        프로이센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1865년 해군 소위후보생으로 프로이센 해군에 입대했다. 킬 해군사관학교(Kiel Naval School)를 졸업 후 1869년 소위로 임관했다. 어뢰정 소함대 지휘관과 어뢰정 함대의 감찰감을 역임했으며, 해군 최고사령부 참모장으로 기술적 능력도 과시했고, 전술 원칙을 착상하여 체계적으로 개발했다.
                                                        1895년 소장으로 진급한 뒤 1896년부터 1년 간 동아시아에 파견된 독일 순양전대(German cruiser squadron)를 지휘했고, 중국 청도(靑島)를 미래의 독일 해군기지로 선정했다. 1897년 6월 국가해군청(國家海軍廳, Reichsmarineamt)1) 장관에 임명된 이후 20년 간 빌헬름 2세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일 함대의 증강에 노력했다.
                                                        1898년 티르피츠는 독일 해군력 개편을 위해 ‘제1차 함대 법(First Fleet Act)’을 도입했다. 이 법은 1904년까지 해군으로 하여금 기함 1척과 전함 16척, 근해 장갑함 8척, 대형 순양함 9척 및 소형 순양함 26척을 갖추도록 규정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전쟁 시 해군 공격력의 한계를 이 정도의 해군력만 갖추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1898년 제정한 법률이 공해 내에서 활동할 전투 함대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1900년 도입한 '제2차 함대 법(Second Fleet Act)'은 보다 크고 근대적인 외양함대를 건설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그러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 법률은 1917년까지 해군을 기함 2척과 전함 36척, 대형 순양함 11척 및 소형 순양함 34척으로 증강시키도록 규정했다. 1897년 총리를 거쳐 1900년 귀족으로 등극했고, 검은 독수리 훈장(Order of the Black Eagle)을 받았다.
                                                        한편 영국은 독일의 ‘함대 법’에 뒤늦게 반응했다. 그러나 1904년 프랑스, 1907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영국은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전함'을 진수시키는 등 영국의 함정 건조 능력은 빠르게 증강한 반면 독일의 건조 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1914년 당시 작전에 투입되거나 건조에 착수한 영국 전함이 49척이었던 데 반면 같은 규모의 독일 전함은 29척에 불과했다.
                                                        결국 해군력 건설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자 티르피츠는 1916년 3월 사임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독일의 안보를 걱정했던 그는 '조국 당(Fatherland Party)'이라는 애국운동의 공동 창시자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 그의 영향력은 별로였다. 1924~28년 독일 국민당 소속 의원으로 다시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 후 바이에른(Bavaria)으로 은퇴 후 1930년 에벤하우젠(Ebenhausen)에서 숨졌다.
                                                        티르피츠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근대적인 해군장교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헌신적인 정신, 과학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고 뛰어난 조직가였다. ‘해군법(Naval Laws)을 꾸준히 실행하는 것을 다른 그 어떤 기술적 · 전술적 · 정치적 고려 사항보다 중히 여겼다. 해군력건설과 그 효과는 해군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고, 나아가 해군의 정치적 가치도 결정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독일 해군은 그의 지휘 아래 세계에서 2번째로 강력해졌다. 다만, 그로 인해 독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독일 해군이 효율적인 군사 무기로는 만들어졌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애초의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첨부파일 :  
                                                        badge
                                                        Q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해양재단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