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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출생~사망 : 1769~1859년 (관직:박물학자, 탐험가)
                                                        ‘훔볼트 해류’를 발견한 박물학자 · 탐험가
                                                        1845년『우주(Kosmos)』를 저술했다. 과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의 정식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하인리히 알렉산더 프라이헤르 폰 훔볼트 (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이다.
                                                        그는 오늘날의 지구과학 · 생태학에 속하는 과학분야인 자연지리학과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훔볼트 해류(The Humboldt Current)1)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685년 루이 14세의 프로테스탄트 금지령 이후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Huguenots :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다. 1779년부터 엄격한 칼뱅주의자(Calvinist)였던 어머니로부터 양육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알맞는 자격을 겸비하도록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대학교에서 정치사 · 경제학 · 고전문학 · 언어학 · 수학 등을 교육시켰다. 1789~90년 괴팅겐(Göttingen)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광물학과 지질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작센(Saxony) 주의 프라이베르크(Freiberg)에 있는 광산학교(School of Mines)에서 깊이 공부했다. 아침에는 주로 광산에서 보내고 오후 5, 6시간 수업을 받은 후 저녁에는 식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1792년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광산부에서 일하다가 후작의 영지(領地)인 안스바히-바이로이트(Ansbach-Bayreuth)가 있는 피흐텔 산맥(Fichtel Mountains)으로 갔다. 그는 광산을 돌아다니거나 버려진 갱(坑)을 재정비했다. 이 갱에서는 금과 구리가 생산되었다. 그는 모든 광산 활동들을 감독하던 중 안전 램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돈으로 젊은 광부를 위한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1797년 광산 일을 그만둔 뒤 과학탐사를 위해 측지학(geodetic) · 기상학(meteorological) ‧ 지구자기장(geomagnetic) 측정법을 공부했다. 그 후 각고의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의 허락을 얻어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방문하고 과학탐사에 나섰다. 1799년 여름,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에메 봉플랑(Aimé Bonpland, 1773 ~ 1858)과 함께 마르세유(Marseille)를 출항했다. 봉플랑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만났던 인물이다. 1799~1804년 동안 그들은 라틴아메리카를 도보로 또는 말과 카누를 이용하면서 무려 9,650㎢의 지대를 탐험했다.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초원지대와 관목지대를 지나 오리노코 강(Orinoco River)의 지류인 아푸레(Apure) 강의 둔덕까지 탐사한 뒤 카누를 이용해 오리노코 강까지 내려갔다. 아푸레 강과 카시키아레(Casiquiare) 강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카시키아레 강이 아마존 강과 오리노코 강의 수계 사이에서 이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3개월 동안 탐험을 마친 그들은 쿠바에서 잠시 머문 뒤 이들 두 사람은 안데스 산지를 탐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돌아왔다. 콜럼비아의 보고타에서 페루의 트루히요(Trujillo)까지 안데스 고산지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에콰도르의 키토(Quito) 주위에 있는 모든 화산들을 포함해 많은 봉우리도 등반했다. 특히, 훔볼트는 6,265m의 침보라소(Chimborazo) 산을 5,784m 높이까지 등반함으로써 그 후 30여 년 간 세계 최고의 등반가로 기록되었다. 그들은 로프 · 아이젠 · 공기통 등 현대적 등산장비 없이 이런 등반을 성취했다. 또 지금은 페루 해류로 불리는,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해류를 연구했다. 두 사람은 키토에 도착 후 총독과 스페인의 사회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았다.
                                                        1803년 봄, 두 사람은 에콰도르 과야킬(Guayaquil)을 출항하여 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까지 항해했다. 스페인 식민지 중 가장 발달되고 문명화된 아카풀코에서 마지막 1년을 지내는 동안 지역을 탐사했다. 잠시 미국에 머무는 동안 제퍼슨 (Jefferson)대통령의 환대를 받았고, 그 후 프랑스를 향해 출항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이런 과정에서 얻은 수많은 정보를 갖고 돌아왔다.
                                                        그 정보들은 막대한 양의 새로운 식물 표본, 위도·경도의 확정, 지구자기장 분야 구성요소들의 측정법, 기온 · 기압의 일일측정, 멕시코의 사회적 · 경제적 상황에 대한 통계자료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훔볼트는 미국의 상업 중심지에 머물 때마다 기록들과 그의 수집품들의 복제품을 저명한 문헌학자인 형 빌헬름과 프랑스 과학자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국 함대에 의해 대륙이 봉쇄되는 바람에 그의 소중한 우편물들은 대부분 도착하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생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훔볼트는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프랑수아 아라고(François Arago, 1786 ~ 1853)와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과 깊이 교류하며 협조를 구했다. 지도와 삽화들을 새길 조판공들 및 출판업자들을 만나서 그간의 탐험의 과학적 성과들 - 등온선(평균기온이 같은 지점들을 연결한 선)과 등압선(주어진 시간이나 시기에 동일한 기압을 가진 지점들을 연결한 선)이 표시된 훔볼트의 기후도와 밤과 낮의 평균기온을 비롯한 기상자료 - 를 포함한 비교기후학의 기초가 되는 책 30권을 발간했다. 그의 연구로 지표가 액체 상태에서 퇴적되면서 형성되었다는 ‘수성론(水成論)’의 가설이 전면 부정되었다.
                                                        그의 저서인 『뉴 에스파냐 왕국에 대한 정치 수필(Political Essay on the Kingdom of New Spain)』에는 멕시코의 지리 · 지질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고, 멕시코의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상황, 광범위한 인구통계 등도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서도 격하게 반대했다. 그가 멕시코의 은광에 관해 기술한 것은 영국 자본 및 광산 전문가들이 광산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탐험과 책을 출판하는 데 자신의 재산을 거의 다 썼다. 그로 인해 남은 생애 동안 재정적인 곤란을 겪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젊은 과학자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학생들이 연구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연구기관에서 일하게 된 사람으로 독일의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 ~ 1873), 스위스 동물학자인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 1807 ~ 1873)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폭넓은 관심과 다정한 성품은 그가 남긴 많은 편지에 잘 나타난다. 현재 8,000여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1827년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과학 회담을 개최했다. 1829년 훔볼트는 마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방문하면서 알타이 산맥(Altai Mountains)과 중국 국경까지 여행했다.
                                                        1829년 빈 대학교에서 자연지리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소를 만들고, 프로이센에 기상학 연구소도 세웠다. 그 외 동식물, 천문, 기후, 광물, 해양 등 각종 분야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전, 그는 남아메리카에 관심을 갖게 한 '자기폭풍(magnetic storms)'이라는 지구 자기장의 갑작스러운 변동을 조사했다. 조수들의 도움을 받은 그는 베를린의 한 조용한 정원 정자에서 자력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나 이들 자기폭풍이 지구 내부의 원인 탓인지 지구 바깥의 원인인지를 밝히려면 범세계적인 자기관찰망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 ~ 1855)는 독일 · 영국 · 스웨덴의 몇몇 연구소에서 자기 분야를 동시에 측정하기 시작했다. 1836년 여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훔볼트는 영국의 해외 영토에 이를 연구할 부설연구소를 세워야 한다며 런던 소재 왕립협회에 요청했다. 그러자 영국정부는 캐나다 · 남아프리카 · 호주 · 뉴질랜드 등지에 영구 관측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고, 남극탐험을 위한 장비를 지원했다.
                                                        이 분야에 대한 국제적 협조체제로 산출된 많은 자료 덕분에 영국의 지구물리학자인 에드워드 새빈 경(Sir Edward Sabine, 1788 ~ 1883)은 지구 대기에 있는 자기폭풍이 태양 흑점의 주기적인 활동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폭풍의 지구 외적 원인을 증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죽기 전 25년 동안『우주』를 집필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생존 시 4권으로 출간된『우주』는 문학적 문체로 쉽게 저술되었다. 이 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의 모든 유럽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우주』제5권을 집필하던 1859년 90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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