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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출생~사망 : 1843~1914년 (관직:제독)
                                                        북양함대를 격파한 제독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은 양무운동(洋務運動)1)을 주도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당대 아시아 최강의 북양함대(北洋艦隊)2)를 건설하였다. 1891년 북양함대가 일본을 친선 방문했을 때, 해군장교 이토 스케유키는 북양함대의 위용에 감탄하는 대신, 군함 승조원들의 흐트러진 규율과 기강을 보고는 청국 군함에 대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사쓰마번(鹿兒島藩)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1843년 태어난 스케유키는 어려서부터 막부의 교육기관인 카이세이쇼(開成所)에서 영국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당시 세계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 해군의 포술과 항해술을 익혔다. 이후 사쓰에이전쟁(薩英戦争)3) 및 보신전쟁(戊辰戦争)4)에 참전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본격적으로 해군을 건설하자 1871년 해군장교로 임관하였다. 1882년에는 해군대좌로 진급하고 류조(龍驤) ․ 후소(扶桑) ․ 히에이(比叡)함 함장을 역임하였다. 1886년 해군소장으로 승진하고 해군대학교 교장을 맡았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연합함대사령장관(連合艦隊司令長官)에 임명되어 일본의 전 함대를 지휘하였다.
                                                        청일전쟁 중기인 1894년 9월 17일, 황해의 압록강 앞바다에서 청나라의 북양함대와 일본의 연합함대가 격돌하였다. 당시 전력면에서 7,000톤급의 순양함 2척을 보유한 북양함대가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북양함대를 보유한 순간부터 자만에 빠져 교육과 훈련관련 예산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수병의 훈련은 부족했고 사기도 크게 저하됐다.
                                                        북양함대는 규율과 기강이 해이하고 특히 훈련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이토 스케유키는 일본함대의 기강을 세우고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한 결과, 북양함대의 주력함들을 격파하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황해해전(黄海海戦) 또는 압록강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도 불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승기를 잡은 일본은 결국 청일전쟁에 승리하고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해군성 군령부장을 역임하였고, 1905년에 원수(元帥)로 진급하였다. 정치권력에는 뜻이 없었던 이토 스케유키는 1914년에 군인으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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