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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이 미쓰마사[米内 光政]
                                                        출생~사망 : 1880~1948년 (관직:해군대신)
                                                        일본제국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는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連合艦隊司令長官), 해군대신(海軍大臣)을 지낸 일본제국의 마지막 해군대신으로서 1940년 1월부터 그해 7월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면서 군부를 견제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와테현(岩手県) 모리에카시(盛岡市)에서 모리에카의 번사(藩士) 요나이 우케마사(米内受政)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計)는 그가 어릴 때 신문배달과 고학(苦學)을 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1901년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를 29기로 졸업하고, 1911년에 해군대학을 수료하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러시아의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1924년에는 전열함(戰列艦) 후소호(扶桑號)、무츠호(陸奧號) 함장을 맡았다. 이듬해 해군소장에 오르고 제2함대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제1 외견함대사령관(外遣艦隊司令官)을 역임하였다. 1930년 해군중장으로 승진하면서 진해요항사령관(鎭海要港部司令官), 제3함대사령관, 사세보(佐世保) 진수부사령관(鎭守府司令官), 제2함대 사령관을 거쳐 1936년 연합함대 겸 제1함대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야전과 참모직을 두루 거치며 온화한 성격으로 해군내에서 신망을 얻은 요나이는 1937년 2월,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내각에서 해군대신에 임명되고 4월에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1939년까지 해군대신으로 있으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해군차관,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군무국장(軍務局長)과 함께 독일․이태리․일본이 참여하는 삼국동맹(三國同盟)의 결성에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1936년에 일독방공협정(日独防共協定)을 체결하자 “왜 소련과 손을 잡지 않은가?” 하고 개탄할 정도로 친소주의자였다. 요나이는 미․영과의 협상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극우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어 몇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1939년에는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1월, 쇼와천황(昭和天皇)의 강력한 천거로 예비역으로 물러나 제37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 취임 후에도 그는 친미, 친영 정책을 취하였으나, 삼국동맹을 추진하는 군부와 세론(世論)의 압박으로 그해 7월 사임하였다. 결국 1940년 9월 27일 삼국동맹(三國同盟)이 육군이 주도하는 군부의 의도대로 체결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한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이 지나다가,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1944년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악화되고 도조(東條) 내각이 붕괴하자 고이소(小磯) 내각에 해군대신으로 복귀했다.
                                                        그는 해군대신으로서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와 함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1945년 8월의 포츠담 선언(Potsdam Conference)의 수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스즈키 간타로 · 히가시쿠니노마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王) ·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의 세 내각에서 해군대신을 역임하면서 패전 뒤의 난국 수습에 힘썼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극동 국제 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쇼와천황이 불기소되도록 노력하였다.
                                                        요나이는 육군의 강경론을 억제하는 정치세력이 해군뿐이었던 시절에 그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48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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