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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룡[李雲龍]
                                                        출생~사망 : 1562~1610년 (관직:옥포만호, 도총부부총관, 삼도수군통제사)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지략가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이 구상한 학익진 전법이 성공할 수 있도록 유인작전을 구사한 장수가 이운룡이다. 충무공은 원균의 부하였던 이운룡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할 정도로 신임했다. 그는 24세이던 1585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병조판서 유성룡의 후원으로 1587년 선전관(宣傳官)1) 이 되었고 1589년 옥포만호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퇴각을 주장하는 원균에게 이운룡은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수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라고 항언할 정도로 기개가 넘쳤다.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최초로 승전보를 올린 옥포해전에서 이운룡은 선봉장이 되어 적선 5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후 사천 ‧ 당포 ‧ 한산도 ‧ 안골포 ‧ 부산포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고 공을 세웠다. 한산대첩 후 웅천 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5년 통정대부로 가자(加資 : 공로로 계급을 올려 줌)되었다. 1596년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 좌수사가 되어 1602년까지 경상도 수군을 지휘하였다.
                                                        1599년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선조와 이별을 하면서 "조선 수군에는 이운룡, 육군에는 정기룡(鄭起龍)2)이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니 이들 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다. 1605년 도총부 부총관, 경상 우수사 겸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1607년 북방의 방비가 급해지자 비변사의 천거로 함경남병사로 전직되어, 기병 별대를 창설하고 갑산성을 수축하였다. 1609년 충청수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체직(遞職 : 벼슬을 번갈아 가면서 함)되고 고향 청도에서 지내다가 49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거영일기(居營日記)』3)와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4)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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