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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수[朴珪壽]
                                                        출생~사망 : 1807~1876년 (관직:평양감사)
                                                        해안방어책을 제시한 평양감사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는『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1830년 그와 교유하던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고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의『연암집(燕巖集 : 박지원의 산문을 묶은 문집)』을 읽고 실학에 눈을 떴다.
                                                        1848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에 나섰다. 그 뒤 병조정랑 · 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1860년 약 6개월 간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하였다.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按覈使)1)로 활동하면서 조선 후기 봉건체제의 모순과 농민의 실상을 체험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6년 평안도 관찰사(觀察使 또는 감사는 조선시대 외관직 문관의 종2품 벼슬)로 재임 중 그 해 7월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치렀다.2)
                                                        평양감사 박규수는 1848년에 이미 윤종의가 쓴『벽위신편』3)의 발문인 ‘벽위신편평어’에서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는 데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인 1866년 8월 11일, 장계를 올리고 서양의 재침을 막기 위해 대동강 입구인 급수문(急水門) 양안, 즉 평안도 용강현 동진(東津)과 황해도 황주목 철도에 진을 신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주요내용은 동진에 서양대포가 뚫을 수 없는 토성을 쌓을 것, 평안도 ․ 황해도의 대형 어선인 교선(橋船)을 본 딴 병선 수척을 건조할 것, 별포수(別砲手) 50명을 모집하여 배치할 것, 성산 ․ 용연 ․ 금성 ․ 황룡 등 내륙의 4개진을 혁파하여 신설 진의 경비에 쓸 것 등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처리나 대동강 하구 방어체계를 강화하는 동진진에 토성을 건설하고자 한 박규수의 해안방위에 대한 구상은 청나라 위원(魏源)의『해국도지』에서 제시된 방책을 깊이 연구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었다.
                                                        그는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반대를 무릅쓰고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앞장섰다.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서양 문물에 밝아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 김옥균, 박영호 등 개화파에 영향을 주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환재집』,『환재수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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