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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따옴표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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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호(공주대 교수)

최부

최부의 표해록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와 함께 세계 3대 중국여행기로 꼽히는 유명한 기행문이다. 앞의 두 여행기가 처음부터 중국을 여행할 목적으로 떠난 인물들의 여행기라면 표해록은 예상치 못한 표류로 중국에 다녀온 후에 제작되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최부는 1454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147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486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487년에는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성종으로부터 녹피(사슴가죽) 한 벌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1486) 11월에는 제주삼읍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도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본거지를 떠나 다른 지역에 살며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한 사람, 주인에게서 도망하여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노비들을 찾아내고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두 달 반쯤 되었을 무렵인 1488년 1월 30일, 고향에서 노비 막쇠가 상복을 가지고 찾아와 아버지의 부음을 전하였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위해 제주 목사 허희는 수정사 승려 지자의 배를 구해 그가 곧바로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최부는 제주목사가 구해준 배를 타고 부음을 들은 지 4일 만인 윤 1월 3일에 일행 43명과 함께 조천관에서 나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여 본래 정박 예정지인 추자도에 도착하지 못하고 초란도에 임시로 정박하였다.

일행은 간신히 풍랑을 피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날 밤 파도가 높아지면서 배의 닻줄이 끊어져 배가 파도를 따라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최부가 성급히 떠나려 했기 때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라고 여기고 그를 원망하였다. 심지어 배의 운항을 맡은 이들도 최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목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위태로워졌을 무렵 다행히 비가 내렸다. 최부는 옷가지들을 이용해서 물을 받아 식수를 마련하게 했다. 일행은 계속 바다를 떠다니다가 표류 10일 만에 중국의 연해에 도착하여 중국인들이 탄 배 2척을 만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물을 나눠주는 등 선심을 보였으나 그 날 밤 해적으로 돌변하여 옷가지와 양식을 빼앗고, 최부 일행을 먼 바다에 끌어다 놓아 버렸다. 그 후로 최부 일행은 5일을 바다에서 떠다니다가 동풍을 타고 겨우 중국 남부 해안에 도착했다. 일행이 정신을 차려보니 여섯 척의 배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최부는 필담을 통해 그곳이 절강성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산(牛頭山) 앞바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부와 그의 일행은 비가 오는 틈을 타서 배에서 겨우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배를 버려둔 채 숲속으로 도망쳤다.

최부

최부의 선택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최부 일행을 처음 발견한 중국의 관리는 그들을 왜구로 몰아 목을 베어 바치고 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만약 최부 일행이 계속 배에 있었다면 왜구로 몰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난 최부 일행은 해문위의 도저소에 머물러 여러 차례 심문을 받은 끝에야 왜구라는 의심에서 벗어났다. 최부가 가지고 있던 마패에 중국의 연호가 있었던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그들은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로 이송되었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거슬러 올라 명나라 수도 북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최부가 10여 일 만에 북경에 이르자 황제가 그에게 옷을 하사하였으며, 대신 중에도 옷을 선물한 이가 있었다. 최부는 학식이 풍부하고 시를 짓는 재주가 탁월하여 가는 곳마다 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강남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동안 만났던 관리들과도 필담을 통해 의견을 나누며 우정을 쌓았다.

우여곡절 끝에 최부 일행은 북경에서 산해관(山海關)―광녕위(廣寧衛)―요동(遼東)을 거쳐 6월 4일에 의주(義州)에 도착했으며, 6월 14일에는 한양의 청파역에 도착하였다. 제주에서 표류한 지 160여 일 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돌아오자 성종은 그를 크게 환대하였다. 그리고 표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일기로 엮어 제출할 것을 명하였다. 최부는 청파역에서 9일 가까이 묶으며 왕명에 따라 명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일기로 지어 바쳤다. 마침내 최부가 부친의 상을 치르기 위해 나주로 내려가자 성종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가 명에서 본 수차를 재연해 볼 것을 명하였다. 최부는 왕명에 따라 기술 좋은 장인과 함께 수차를 만들어 바쳤다. 그의 수차는 조선에서 널리 이용된 것 같지는 않지만 중국의 선진 농구와 농법을 알리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부의 표해록에 관한 평가는 중종 6년 3월 14일에 참찬관 이세인이 건의한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여는 따옴표 최부의 『표해록』은 금릉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산천·풍속·습속을 갖추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하여 알 수 있습니다. 닫는 따옴표

그러나 고국에 돌아온 후 곧바로 나주로 내려가 상을 치르지 않고, 왕명을 받아 일기를 찬술한 그의 행위는 오랫동안 다른 관리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관직을 받았으나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쫓겨났다가 마침내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쓴 표해록은 530여 년 전 강남과 북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생생한 기록이다. 당시 그가 도착한 항주 일대, 즉 강남은 중국에서도 풍부한 생산력을 토대로 경제와 문물이 크게 발달한 지역이었다. 명의 수도가 강남에서 북경으로 옮겨진 후 강남의 실정을 몸소 목격한 이는 최부가 처음이었다. 강남은 조선의 선비라면 한 번쯤 가고 싶어하는 이상향이었으나 표류가 아니면 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500여 년 전 강남에서 북경, 북경에서 한양까지의 광경을 우리가 그림처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표해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서주와 북경 간의 회통하(會通河)를 지나며 목격한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의 비문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그 다음 해 수몰되었으므로 오직 표해록에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표해록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표해록(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남 최부의 묘(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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